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슈바이처 (문단 편집) === 비난과 그에 대한 반박 === 당대 그의 조국인 독일이 저지른 만행 때문인지 '독일 출신인 슈바이처 역시도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슈바이처 본인이 자신의 설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여러 번 언급했고 [[평화]]와 [[인류애]]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기에 이는 음해에 불과하다는 말이 많다. 가봉 독립 당시 독립을 너무 빨리 한 것 같다고 우려하며 "원시적인 사회에서 근대화 사회로 수월하게 바로 넘어갈 수 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과도기와 성장기가 필요한 법이다" 라고 생전에 발언한 적이 있었는데 지극히 상식적인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프리카는 내전과 기아와 사회 혼란이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반면 슈바이처를 "자비로운 [[독재자]]"였다고 묘사한 경우도 있다. 이들 비판의 주된 요지는 슈바이처는 랑베레네의 병원을 일부러 열악하고 형편없어 보이도록 방치했고 실제 시설은 그 많은 기부금은 어디로 갔나 싶을 수준이었다 하며, 슈바이처가 환자들을 고압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런 비난은 [[억까|'''억지스러운 비난, 지나친 흠잡기에 불과하다''']]. 우선 기부금이 병원 시설을 발전시키는 데 충분했다는 것은 오로지 그들만의 생각이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수천 개의 기부단체들과 [[적십자사]], [[국경없는 의사회]] 등이 전 세계를 누비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고 있고 전 세계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막대한 기부금을 지원하고 있음에도 아프리카의 의료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다큐 같은 데만 봐도 알겠지만 허름한 오두막에 간이용 침대 여러 개와 약 보관용 냉장고 하나만 덜렁 둔 채로 운영되는 병원이 태반인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오지에 의약품과 의료 도구를 지원하려면, 그걸 마련하는 비용은 물론 현지까지 옮기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그리고 경로 중간의 방해자들을 뚫고 가야 하는 위험성도 있다. 현대에도 [[니콜라스 마두로|구호 물자인 줄 잘 알면서도 공격해 인력과 물자를 모두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정부]]도 있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반대파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그나마 슈바이처가 있던 [[가봉]]은 독재자가 집권해있을지언정, 일단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안정되어있고 주변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치안이 괜찮은 편인데도, [[정글]] 지대라는 험악한 환경과 더불어 [[코끼리]] 등의 위험한 맹수와 각종 해충이 들끓어서,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커녕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조차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물며 의료 봉사단도 몇개 없고 오늘날처럼 세계구급 기부 단체들도 없던 시대, 일부 인사들의 기부금에만 의존해야 했던 슈바이처 박사의 병원은 어땠을까? 당시에는 의료 봉사와 기부금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거니와, [[세계 대전]]과 [[대공황]]으로 전 세계에 경제적 위기가 닥쳐 '''사람들이 기부를 할 여력 자체가 없는 시대'''였다. 실제로 슈바이처가 수용소에서 나온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직접 강연을 다니며 의료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자신이 번 돈으로 충당해야 했다'''. 슈바이처가 병원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도 [[어불성설]]로, 그는 모금 운동과 강연을 다니며 병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노벨상 상금부터 자신의 사적 재산까지 모든 돈을 털어넣을 정도로 병원과 환자들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슈바이처가 이 기부금 중 단 몇 푼이라도 빼돌려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 사용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그 시대에 [[수용소]]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생명과 모든 재산을 바쳐 아프리카에 헌신한 슈바이처 입장에서는 기부금 몇 푼 덜렁 투척하고는 실제 의료 환경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경험도 해본 적 없으면서, 왜 병원 시설이 이 모양이고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의료]] 시스템이 유럽만 못한 거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위선자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병원 시설에 대해선 슈바이처가 의도한 부분도 있었다. 다른 의료봉사자들은 [[흰 가운]]과 근현대식 건물로 전형적인 유럽식 병원을 구축하자고 했지만, 오로지 슈바이처만이 원주민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가족까지 모두 데려와서 치료받고 가족들이 편안히 간병할 수 있도록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오두막]]이랑 최대한 비슷하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해 봉사자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물론 외관과 인테리어가 그랬을 뿐 [[방충망]]을 쳐서 모기 같은 벌레의 침임을 막고 열기와 습기를 수시로 빼내는 등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 전염을 막기 위한 조치는 다 했다. 애초에 돈을 내기 어려운 형편인 환자를 치료해 주는 대신 가족의 노동력을 받기로 하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병동을 지어갔고 식량의 일부를 조달했다. 그곳은 곡물과 저장 식품과 연료를 도시에서 운송해 와야 했고, [[시멘트]]조차 생산되지 않는 곳이고 직물과 유리병과 [[깡통]]도 귀한 곳이었다. 가공한 나무판자도 자신이 치료한 식민지 백인들의 호의로 얻어야 했다고 한다. 자기 자금과 지인을 통한 모금, 출판 인세는 유럽에서 붕대와 약품을 사보내는 데 전액 사용. 결국 허술해보이는 병원의 가장 큰 원인은 자금난과 [[가격 대 성능비]]였던 것이다. 유럽에서 모금한 경화(硬貨)[* hard currency. 어원적으로는 금속으로 만든 화폐 내지는 언제든지 금이나 다른 귀금속으로 바꿀 수 있는 태환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일반적으로는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어 국제 거래에서 지불할 수 있는 화폐(예컨대 달러)를 가리킨다.]는 단 한 푼이라도 더 모두 유럽에서 사보낼 수 있는 [[의약품]]과 의료 기구를 구입해 운반하는 데 사용하고, 현지의 노동력과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쓸데없이 돈을 쓰지 않고 현지에서 충당하면서 가장 많은 현지인을 치료할 길을 찾은 것이다. 진심으로 원주민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원주민들에게 맞게, 원주민들을 위해' 지은 병원이었으니, 당연히 '식민지에 체류하는 백인들을 위한' 병원과 달리 백인의 취향에 안 맞을 수밖에 없다. 이상적인 열대 선교 조직을 구성하는 의사와 전도사 등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묘사한 글을 보면, 그가 가학 성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다 적어놓고 현실은 녹록치 않다며 푸념한다. 독재자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우선 [[의사]]라는 직책에 대한 이해와 [[정상참작]]이 필수인데, 오늘날 현대화된 사회의 학식 있는 환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의사들은 다소 권위적인 태도를 취해 이런 의사들까지도 "니들이 뭐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냐? 의사 직함 달면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본인의 상태에 대한 위기감이나 자각이 없는 환자들의 경우 고압적으로 대해서라도 반드시 수술이나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의사의 또다른 임무이며, 특히 1초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응급실]]에서는 이런 태도가 더더욱 강화된다. 하물며 응급실보다 더한, [[한센병]]과 [[전염병]]이 [[창궐]] 중인, 즉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 같은 열악하고 급박한 환경에서, 의료 지식은커녕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병이 낫는다'라는 것에조차 의구심을 품고 거부감을 느끼는 원주민들을 상대해야 했던 슈바이처는 어땠을까? 정말로 독재자가 되어야 했던 게 오히려 당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크림 전쟁]] 당시 망치를 들고 보급 담당 장교와 싸우면서 오기와 악바리로 의료 환경을 개척해야 했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같은 사례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생애를 다룬 몇몇 전기에서는 이 당시에 그녀가 '''[[권총]]으로 무장하고서 보급 담당 장교를 협박했다는''', 현대적 관점으로도 심히 후덜덜한 행동을 했다고 묘사하기도 하는데, 의료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을 상대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다.]. [[2015년]]에도 [[에볼라 바이러스]]를 치료하려는 의사들에 대해 주술만이 치료법이라고 하며 의사들을 피해다니는 원주민들이 많은데, 의료 봉사가 거의 없었던 당시 원주민들이 의사와 의료 서비스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협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의사소통도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문명]]에 대해 무지 그 자체라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린 것도 인지 못하여 저주받았다고만 생각하여 근현대의 의술을 거부하는 환자를 상대로 무조건 설득만 하라는 것은 지나친 억지 혹은 불가능을 강요하는 셈이다.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있듯, 살인을 쉽게 하고, 악습과 주술에 매여 생명을 잃고, [[알코올 중독]]에, 시시한 유럽산 장난감과 사치재를 사는 데 일 년 수입을 함부로 탕진하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는 병원에 해코지를 해대고, 계약을 편의대로 어기며 더러는 위협하는 사람들을 매번 웃으며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환자를 강압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야기 역시 몰이해에서 기반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큰 원인이지만 당시 슈바이처가 처한 환경도 [[선진국]]에서 진료하듯이 환자에게 이해를 구하는 식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주민 사회에서 서양인 의사는 주술사와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문제가 생겨도 '백인이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정도였다.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환자를 치료해주는 대신 환자의 보호자에게 하루 일정시간 동안 병원 주변에 일군 밭에서 노동을 요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 환자는 길게는 며칠씩 [[카누]]를 타고 와야 하는 먼 마을에서 보호자 여러 명과 같이 병원에 오는데, 간단한 처치로 끝나지 못하면 당연히 입원해 숙식을 병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의사가 환자를 받아들이면 보호자들이 환자와 같이 입원 병동에서 눌러 살며 뒷바라지하고, 병동 건물은 그런 환경을 고려해 설계돼 있다. 때로는 환자를 내밀고 보호자가 침대를 차지하기도 해서 의사가 규율을 세우기도 했고, 감독관이 없으면 환자 가족은커녕 슈바이처 자신의 현지인 조수마저도 맡긴 일을 하지 않는데 그들은 그것을 백인이 잘못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슈바이처 자신은 진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 감독, 노동 감독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체격이 듬직한 여성 간호사가 근로 감독을 하면 가장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환자가 병원에서 죽으면? 시신이 식기도 전에 의사는 소송당했다고 한다. 그들 전통의 방식으로. 결론적으로 그는 반대에 부딪혀가면서까지도 최대한 환자에게 친근한 환경으로 병원을 조성하고, 때로는 윽박질러가면서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수용소에 갇혀도, 노벨상을 받아도, 아내가 죽어도 그는 삶의 희노애락을 겪으면서도 결국에는 언제나 랑베르네 병원으로 돌아갔고 끝내 거기에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단순 몇 차례 기부로 퉁치거나 기독교 선교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입성한 위선적인 백인 봉사자들과 다르게 그의 병원은 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목적에만 충실했으며 그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 모든 것을 투자하여 병원을 지켰다. 이런 그의 노력을 [[위선]]이라 폄하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슈바이처는 되려 그 시대 사람으로선 보기 드물게 아프리카 환자들을 존중하고 헌신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마지막까지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위인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의사였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가 1875년생임을 반영해야 한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 아니다. 유럽의 모(母)교회에서 활동비를 받는 전도사가 아니라, 독립적인 의사로서 자비를 들여 아프리카 가봉 일대 원주민의 복지를 향상시키고자 간 것이다. 그의 저서를 읽다 보면 19세기 유럽 지식인인 그의 시각이 백 년 정도 지난 지금 관점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면을 몇 가지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알고 나서도 그것을 흠잡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좀 더 논하자면, 슈바이처 박사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헌신적인 인물로, 19세기 [[영국]]의 레전드급 [[아프리카]] 탐험가이자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 탐험 중에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착취를 당하는 것에 대해 쓴소리를 날린 바 있으며,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총을 쏘면서까지 구해낸 적도 있는 등[* 이때 구출된 사람들 중 두 명의 청년들이 뒷날 리빙스턴이 사망하자, 열대 지방인 아프리카의 더운 날씨에 시신이 상하지 않도록,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서 가까운 항구로 운구했다.], 확실히 인격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그도 당시의 영국이 행하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자국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아프리카인의 복지가 크게 개선될 거라며 옹호했던,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충공깽]]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나쁜 것이 아니라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시대적 한계가 딱 거기까지였을 뿐으로, 당시에는 수준높은 과학기술과 복지 체제를 이룩한 곳이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말고는 없었던 지라 '[[백인의 의무|좀 더 발달된 기술과 복지를 통해 여기서 소외된 비(非) 백인들을 계몽시킨다]]'는 생각이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발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이 [[백인의 의무]]라는 논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콩고 자유국]] 같은 사례를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알았다면, 격하게 분노했을 거란 얘기다. 아무리 미쳐 돌아가는 암울한 시대에도 사람으로서의 윤리가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광풍에 매도되어 미쳐가던 19세기엔 지식인으로서 '''그나마''' 양심과 정상에 가까운 사고방식이었다. 자신들보다 발달하지 못한 나라의 주민들을 '미개한 것들', '마음껏 착취해도 당연한 노예', '같은 인간이 아닌 말할 줄 아는 짐승'쯤으로 취급하던 미친 차별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일본]]에도 이런 케이스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야나기 무네요시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일본인]]이던 그는 비록 자국의 식민 지배 하에 고통받던 [[한국인]]에게 동정 이상의 생각을 하지는 못했으나, 당대의 일본에서 [[후세 다츠지]] 같은 인권운동가마냥 대놓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면 [[조센징]]이니 [[역적|대역죄인]]이니 하면서 생매장당하는 현실에서 이 정도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 당대의 한국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양심적인 사람으로 대접받았다. 이렇게 제국주의 광풍이 불어닥치는 시대 속에서 지식인들이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계가 있었다.] 즉, 슈바이처 박사나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식민 지배자들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이자 모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